북쪽 나라, 기억의 집

북쪽 나라, 기억의 집페로 제도 | 이경택 겨울의 북유럽은 내 기억과 교감하는 나의 정서적 고향이다. 겨울 이 아닌 계절에 그곳을 아직 가본 적이 없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겨 울은 대부분 유럽대륙 북쪽의 광경이다. 어느 겨울 영화에 등장한 연인이 마주치는 낭만 가득한 장면이라든지, 많은 명대사가 귓가에 맴도는 감격적인 풍경이라고 볼 순 없었다. 다만, 내가 아무런 생각 을 하지 않아도 되는, 머릿속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나의 기억 속 자유의 땅은 대개 도심에서 차로 몇 시간을 달려야 도 착할 수 있었다. 오로라가 피고 지는 곳. 노르웨이의 로포텐이 그랬 고, 러시아의 무르만스크가 그러했으며, 아이슬란드도 같은 범주에 있다. 북쪽 유럽의 겨울. 오로라가 만개하는 몇 안되는 밤을 제외하 곤 어떤 탄성이나 감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억지로 여행의 감정을 고조시킬 이유도 없었다. 그 백지 같은 풍경은 때론 무서울 만큼 고 요해 생각과 동요되는 감정을 정지시켰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스스 로 포멧(Format) 되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와 정서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북쪽 유럽의 적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 이라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가끔은 머릿 속을 비울 수 있는 자유를 인정받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공유하고 싶은 광경이 북쪽 유럽의 겨울이었다. 물론 신혼여행으로 북유럽의 겨울로 떠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결 혼식을 마친 다음날, 적막이 감싸고 도는 북유럽의 겨울을 찾아 떠난다니. 그건 나의 사랑에 대한 나름의 도전이자 시험대였다. 갓 부부가 된 우리가 찾은 곳은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덴마크의 외딴섬 페로 제도였다. 페로 제도는 아이슬란드와 맞닿은 섬이다. 아이슬란드와 영국에서 더 가깝지만 어찌된 영문 인지 덴마크령으로 남아 있다. 페로 제도 사람들은 수도를 물어보면 '코펜하겐'이 아니라 '토 르스하운'이라고 자연스레 대답한다. 처음 마주한 페로 제도의 풍경. 오후 5시 정도로 기억한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을 인 수받고 근처 숙소로 향하는 길은 하얀 눈길에 푸른 땅거미가 하늘을 뒤덮은 시간이었다. 하 얀 산자락에 자그마한 집 한 채가 풍경을 수놓자 나는 차를 멈췄다. 잠시 그녀의 반응을 살폈 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먼저 내린 건 그녀였다. 3번의 환승과 18시간의 비행에 지칠 법도 한데, 그녀는 그 광경을 제법 오래 담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도로를 벗어나 눈길을 걸었다. 이따금씩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주위를 비출 때면, 묘 하게도 오래전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뉴저지의 어느 밤 길. 버스를 잘못 내려 한참을 걸어 집으로 가던 겨울이었다. 타지에서 살면서 그렇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간 밤길도 드물었다. 왜 그 날 밤이 기억났는지 모르지만, 홀로였던 기억 속에 그녀가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페로 제도의 첫인상은 기억 저편에 있던 잊혀진 감성과 재회하게 했다. 겨울의 페로 제도는 험하고 고요한 곳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숙소 근처에만 있었다. 하얀 대지 위에 이따금씩 집들이 보일 뿐, 세상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듯했다. 같은 곳을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시간. 귓속에 들리는 소리는 서로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이를테면, 아무것도 없는 태초의 공간에 우리 두 사람이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와 그녀는 함께 지낸 세월보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많다. 그러기에 화려하게 채색되지 않은 대지 위에서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숙소는 130년이 넘은 집이었다. 3대가 살던 집을 수리해서 집 한 채 를 손님에게 내놓는 곳. 집안 곳곳에 오래된 책과 사진들이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안락하게 꾸며놓은 다락방이었다. 그러나 그 녀는 좀처럼 이 고즈넉함을 즐기지 못했다. 나는 집을 본 순간 뉴저지 에 살던 시절, 내 방 옆 다락방이 생각나서 무척 반가웠지만, 그녀는 서부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집이라며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다행히 그런 그녀도 다락방만큼은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집에서 우리는 밤마다 음악을 틀어놓고 서로 좋아하는 술을 한두 잔씩 들이 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햇살에 창가 사이로 거대한 피오르의 전망 이 엿보일 때, 비로소 두 사람 모두 이 집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제도의 아침이 시작되면 우리는 차를 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비게이션이 고장 났다. 급한 데로 지도를 구해 도 로 번호를 보며 길을 찾았다. 보가르 섬, 스트뢰뫼 섬, 이스터로이 섬, 그리고 클락스비크까지 이어지는 눈길을 달렸다. 종종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을이 푸근해 보였다. 아무 일 없는 일상으로 가득한 마을을 보고 있으면, 마치 페로 제도의 삶에 초대된 것 같았다. 그렇다. 난 화 려한 어느 여행지보다 이런 곳을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스스로 생각과 마음을 비우기 위해 찾았던 북유럽의 겨울. 어느새 누군가와 공 유하는 곳이 되었다.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할 이야기도 충분하다. 말하자면 감 정과 기억의 빚을 지게 된 곳이다. 이제는 일상 속에서 어느 부부와 같은 삶을 이어가지만, 가끔 땅거미 지는 눈길을 떠올리며 짧은 대화를 하곤 한다. 평소 말을 아끼는 편인 그녀는 페로 제도 여행이 정말 어떠했는지 말을 하지 않았 다. 다만, 여행에 흥미가 없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떠나는 나 의 출장에 관심을 보였다. 올해 출장을 마치는 날, 그녀가 먼 곳까지 날아왔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나란히 차에 올라타 앉아 낯선 땅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페로 제도는 나에겐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여행을 많이 할수록 그 쌓인 수많은 장면이 오버 랩 되어 도무지 분리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나 는 고향을 찾는다. 여행자에겐 저마다 또 하나의 고향이 생기기 마련이다. 수만 겹으로 겹치는 여행의 기억 속에서도 가장 위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여행지-여 행자의 고향이다. 당신 마음 속엔 어떤 여행지가 고향으로 기억되는가? 글│이경택사진│이경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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