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푸른 동그라미

세상에서 가장 푸른 동그라미레이크타호│미국│안수향 이별의 시절 부디 서로의 안녕을 바라자고 약속했지만 나는 오래도록 안녕할 수 없었다. 다만 떨칠 수 없는 마음들을 어딘가로 가져다가 던져버리고 싶은 한여름 뙤약볕 같은 날들을 걸어갈 뿐이었다. 이별이란 그 단어를 되뇌는 것만으로도 참 외로운 일이다. 스무 살의 이별과 서른 살의 이별은 그 무게도 온도도 참 달랐다. 이제껏 만들어온 정성스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쓸모 없는 것이 되는 기분. 그저 한 사람에게서 멀어졌을 뿐인데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동떨어진 마음이 드는 것이다. 도망가고 싶었다. 갈 수 있다면 최대한 멀리. 그리고 얼른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는 곳으로. 혼자인 것이 상관없고, 그에 관한 생각들이 나를 쫓아올 수 없는 그런 곳. 언젠가 지도에서 보았던 파란 동그라미 모양의 어떤 호수를 떠올렸다. 레이크 타호(Lake Tahoe). 그 푸른 호수가 그때 왜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곳이면 될 것 같았다. 인천에서 시애틀을 경유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를 픽업했다. 곧장 새크라멘토(Sacramento)를 거쳐 숙소가 있는 사우스 레이크 타호(South Lake Tahoe) 지역까지 대략 320km, 시간상으로는 3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 짐을 푼 것이 밤 11시. 멈춰 있던 하루가 드디어 흘러가기 시작했고, 밤이 깊었고 고요했다. 창 밖으로 간간이 눈 내리는 소리도 들렸다. 꼬박 하루를 이동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 보니 기어코 피로감이 한 번에 몰려왔다. 그날은 숙소 침대에 쓰러져 아무 생각 없이 단잠에 빠졌다. 지도에서 보았던 커다란 동그라미를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이른 아침 진하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운전대를 잡았다. 레이크 타호와 레이크 타호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에메랄드베이(Emerald Bay)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일정의 전부는 차로 호수 한 바퀴를 도는 것. 사실 말이 한 바퀴지, 호숫가를 빙 둘러 둥그렇게 나있는 도로의 둘레가 어림잡아 120km, 쉼 없이 달려도 2시간 남짓 걸린다. 이제껏 생각했던 호수라는 단어의 인상과 마음가짐이 바뀌는 대목이다. 전망대로 가던 길, 차창 오른 쪽으로 드문드문, 그러다 만개하는 꽃처럼 푸른 빛이 일렁였다. 사진에서 보던 그 빛과 같았다. 어렴풋이 보이던 풍경이 도로의 코너를 돌자마자 확 다가온다. 드디어, 그곳이었다. 사소한 것들의 힘 영롱하게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듯하여 에메랄드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깜짝 놀랄 만큼 투명하고 푸르게 빛나는 물빛. 베이(Bay)라는 단어가 바닷가에나 붙이는 말인 줄 알았는데 발걸음이 멈춘 그곳에서 한참을 바라보니 비로소 왜 이 호숫가가 베이라는 이름을 가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시선도 다 닿지 않는 커다란 호수 끝에 어렴풋이 숲이 들어서 있었다. 다정한 얼굴 하나 떠올라 휘휘 고개를 저어 지웠다. 오래 기다린 풍경 앞에선 미뤄둔 마음들이 고개를 내민다. 떨궈지지 않는 마음들이 너무 많아서 한참을 걸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무심하게 이룬 숲과 햇살 아래서 한참 부서진 모래들. 맑은 호숫물이 천천히 밀려드는 파도. 이런 것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외로워도 좋을 마음과 그래도 좋을 풍경과 그래서 괜찮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장면. 애써 지어왔던 표정 뒤의 것들을 왈칵 쏟아냈다. 딱히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만 생각했다. 내 오래된 사랑이 끝났구나. 내 오랜 마음이 이제는 저물어야 하는구나. 그렇게 실컷 무너지는 마음, 와르르 쏟아지도록 두면 다시 쌓고 싶은 마음들이 생길 거라 굳게 믿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내 마음의 소리보다 호수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올 때, 그제야 내가 미국, 그것도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 사이의 외딴 호수 어딘가에 있으며 아직 호수의 절반도 걸음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직 남은 날들이 더 많았지만 그날 굳이 호수 한 바퀴를 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름도 근사한 킹스비치(King's Beach)를 한참 거닐고, 우연히 마주치는 여행자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스치는 풍경을 만끽하며 도로를 달리다 네바다 주임을 가리키는 싸인을 지날 때엔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하며 어느덧 호수 반대편에 다다랐다. 고작 반나절이 지났고, 고작 아까 서있던 곳의 건너편에 있을 뿐인데 참 많은 시간이 지난듯한 기분이다. 오늘 하루 동안 지나온 길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니 큼지막했던 것이 작아 보이기도, 작은 것들이 모여 커다랗게 와 닿기도 한다. 언뜻 마음도 그렇겠다 싶었다. 그 밤 레이크 타호 푸른 호수 한 켠에는 내가 흘려 보낸 마음들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고, 눈 덮인 깊은 산 사이로 드문드문 눈 녹는 소리가 들렸다. 또 누군가의 마음 하나,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도 계절로 흩어졌다. 밤을 담는 일 밤하늘에는 언제나 어떤 약속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내 세상은 이렇게 어지럽고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데 밤하늘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질서로 빼곡하게 빛났다. 밤하늘과 계절의 약속은 어김이 없었고, 그래서 밤하늘을 보면 괜스레 안도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믿음이라던가, 잘 해낼 것이라는 용기, 괜찮을 것이라는 마음이 적어도 그 하늘에는 있었다. 레이크 타호. 시계는 새벽 3시 31분을 가리킨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 시간대에서 나는 여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몇 번을 자고 깨다 결국은 밤하늘이나 볼까 싶어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숙소가 위치한 자그마한 시내를 지났다. 낮에 보았던 패스트푸드점 몇 개와 주유소를 지나고, 자작나무 숲도 지나 에메랄드베이로드를 달리던 그때. 새까맣고 아득한 밤과 숲 사이로 난 좁은 도로의 코너를 돌자 쭉 뻗은 도로 위로 월몰 직전의 달이 떠있었다. 상현이었다. 저 빛을 따라 달리다 보면 달 어딘가에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이 선명했다. 차를 세우고 전조등을 껐다. 삼각대와 카메라를 놓을 겨를도 없이 별빛이 쏟아진다. 달은 어느새 한참을 저물고. 산 위로 마침 떨어지는 별똥별이 짧은 궤적을 그렸다. 맨눈으로도 은하수가 또렷이 보였다. 하얀 설산 위로 걸린 은하수는 유유히 계절을 걸어가고 있었다. 착해 빠진 이 호수는 내가 흘려 보낸 마음들을 조용히 보듬는 것도 모자라 다시 그 마음들을 깨끗하게 닦아 하늘에 비추고 있었다. 언젠가 삶이 지치고 나에게서 마저 도망치고 싶을 때, 이곳에 오면 분명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마음이 들었다. 밤을 담는 일은 흐트러진 마음을 딛는 일일까. 이렇게 절절한 밤이라니. 이렇게 절절한 위로라니. 나는 다시 내가 되고, 어둠은 어둠이 되고, 길은 길이 되고, 추억은 추억이 되어야 마땅하다. 글│안수향사진│안수향 artravel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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